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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움

평생학습을 통한 변화와 성장

김종영(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유정(웹진 <다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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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가을의 끝에 창간한 웹진 <다들>이 어느덧 서른 번째 정규 호를 내놓습니다. 늘어난 독자 수만큼 높아진 기대에 부응하고자 내달에는 새 옷으로 갈아입을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해본 이달의 주제는 ‘변화와 성장’입니다.
현대 시민은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는 변화, 그리고 성장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평생학습’이 존재하고, 그 이름처럼 오래토록 지속할 수 있는 이유겠지요.
여기, 지식인으로서의 시민 ‘지민(知民)’에 대한 사회학자의 이야기와 영화 그리고 책 속에서 찾은 어른의 성장기를 전합니다. 이로써 ‘변화와 성장’을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지민(知民), 평생학습을 통한 변화와 성장

김종영(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시민들이 똑똑해졌다. 그들이 똑똑하기에 촛불혁명으로 불합리한 권력을 심판할 수 있었다. 정보통신기술의 확대, 민주주의의 심화, 고등교육의 보편화, 시민 참여의 확대, 지식 인프라의 확대 등으로 시민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똑똑하다. 나는 이를 지민(知民)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는 지식인으로서의 시민을 뜻한다.

지식인으로서의 시민은 자신과 관계된 일상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연결시키는 의미에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가진다. ‘똑똑한 시민’ 또는 ‘공부하는 시민’으로서의 지민은 공적 영역에서 참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기획하고 설계한다. 따라서 지민은 단지 학교에서만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다양한 방법과 과정 속에서 학습한다. 곧 지민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거리에서도 배운다.

또한 현대사회는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4차 혁명 시대가 왔다- 삶을 주체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을 배워야만 한다. 따라서 평생학습은 학교 졸업 후의 부차적인 공부가 아니라 현대사회에서의 삶의 본질이다.

 

다양한 방향에서 비통일적으로 이루어지는 ‘평생학습’

지민(知民)으로서 평생학습의 필요성과 의미를 몇 가지 차원에서 나누어서 생각해보자. 우선 민주주의의 주인은 시민이다. 하지만 간접민주주의 또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주권을 정치인에게 ‘위임’하며 통치를 받는다.

따라서 시민은 지배자인 동시에 피지배자다. 지배자/피지배자의 시민의 이중성은 위임정치인 대의민주주의의 주요 모순점이다. 최순실-박근혜 사태에서 시민들은 이 모순점을 뼈저리게 배웠고 행동으로 나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시켰다. 시민은 거리에서 다른 시민들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를 배우고 사회를 배웠다.

평생학습이란 교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다른 시민들과의 대화와 연대를 통해서도 배운다. 곧 평생학습은 다양한 방향에서 비통일적으로 이루어진다. 민주주의에 대한 학습이 평생학습에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주인은 시민이며 정치적 공동체의 운명이 우리의 운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정책에 맞서는 깨어있는 시민 ‘지민’

시민의 활동 범주는 투표를 하고 출마를 하는 정치적인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민의식, 시민참여, 시민단체와 같은 말들에서 알 수 있듯 시민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적 활동’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즉 시민은 정치적 영역(political sphere)이라는 좁은 범위보다는 ‘공적 영역(public sphere)’이라는 넓은 범위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쓰레기 사태에서 알 수 있듯 시민들은 자신의 쓰레기 처리를 위해 공적 영역에서 토론하고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의 일상과 관계된 정책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민(知民)이다.

대의민주주의 또는 간접민주주의는 정치인에게 정치적 결정을 위임할 뿐 아니라 전문가에게 기술적 결정을 위임하는 ‘이중의 위임’을 통해 이루어진다. 전문가 없이 정치는 이루어질 수 없는데, 이는 현대사회의 통치에서 지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너무나 많이 보았다. 대표적인 예가 4대강 사업이다. 22조 원의 국민 세금을 투자하고 효과는 거의 없고 환경 파괴라는 재앙만을 남긴 4대강 사업은 근래 최악의 정책실패였다.

시민의 뜻을 배신하고 자신의 이익과 정권의 나팔수가 된 무수한 전문가들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직접 강으로 달려가서 물의 오염을 측정하고 각종 세균들을 관찰하고 불법 공사를 감시했다. 우리는 현장에서 민주주의가 파괴되는 것을 배웠고, 정치인과 전문가의 부당한 결탁이 어떻게 우리의 환경을 파괴하는지를 배웠다. 곧 깨어있는 시민으로서의 지민은 부당한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전문가 집단에 맞설 수 있는 주체이다.

 

평생학습의 주체로서 지민을 요구하는
‘지식사회’와 ‘4차 산업혁명’

평생학습의 주체로서 지민이 요청되는 중요한 두 번째 차원은 현대사회가 지식사회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뉴턴의 말을 비틀어서 “우리는 난쟁이 위에 올라선 거인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과거에 비해 현대사회에서 변화의 범위와 속도가 너무나 거대하며 과거에 성취한 수십 배를 우리는 지금 성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만 보아도 현재의 생산력은 1960년대보다 수십 배가 늘었고 소득도 수십 배가 늘었다. 기술변화는 너무나 빨라서 우리는 여기에 적응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수 년 안에 우리 모두는 인터넷이 연결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것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사람들과의 네트워크에서 단절되는 경험을 겪게 되었다.

어디 스마트폰뿐이랴. 3D 프린터, 블록체인과 비트코인, 줄기세포 치료,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맞춤형 아기 등 신기술이 쏟아지고 있다. 지민은 이 기술들에 압도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를 주도적으로 배워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이다.

기술혁명은 거대한 힘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기회이자 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민은 기존의 지식과 기술체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평생학습을 통해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있는 시민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회물질적 세계(socio-technical world)’다. 곧 사회세계와 물질세계가 분리될 수 없고 하나라는 뜻이다. 물질세계는 사회세계와 함께 엮여서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카카오톡을 통해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이 관계는 이 기술적 하부구조 속에서 창조적으로 변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우리는 기술적 진보를 배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사회관계를 새롭게 구성할 것인지도 고민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면,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서 임금노동이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엘론 머스크(Elon Musk)와 같은 4차 산업혁명의 선구자들은 이를 위해 ‘기본소득’이라는 대안을 찬성한다. 따라서 지민은 4차 산업혁명이 야기하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평생학습의 주체로서 지민이 요구되는 이유는 인간 삶의 본질적 구조 속에 배움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석기 시대이건 4차 산업혁명 시대이건 우리의 몸, 사회, 환경은 바뀌고 우리는 이에 깜짝 놀란다. 우리는 늙어가고 병들며 감염되며 이를 치료하고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배워야만 한다.

석기 시대 수렵채집인들은 사냥감이 떨어지자 다른 세계로 이주를 했다. 2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전 지구상에 퍼진 이유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였다.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우리와 세상은 변하며 생존을 위해 우리는 배워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만 배우지 않는다. 생존만을 위한 배움은 얼마나 표피적이고 각박한가. 우리는 삶을 느끼고 음미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소설을 읽고 공감을 느끼고 콘서트에 가서 음악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과학서적을 읽고 우주의 신비를 느낀다. 배움은 지성뿐만 아니라 감성과 연결된다. 베토벤 시대에는 귀족들만 누릴 수 있었던 클래식 음악을 기술적 진보와 예술의 민주화로 인해 오늘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

평생학습의 주체로서의 지민은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젊었을 때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이가 들어 읽을 때 좀 더 깊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어렸을 때 몰랐던 삶의 비밀, 곧 ‘삶은 깊고 풍부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주체로서의 지민은 사회과학을, 4차 산업혁명의 주체로서의 지민은 자연과학과 공학을, 삶의 주체로서의 지민은 인문학을 읽고 공부한다. 곧 모든 분야가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살찌운다. 인생과 세계에 경계가 없듯 배움에도 경계가 없다. 이것이 평생학습이 우리 삶의 본질인 이유이고, 또한 이것이 우리가 지민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어른의 성장

이유정(<다들> 기자)


세상의 많은 성장소설과 성장영화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만들어진다. 사춘기는 신체적으로 폭풍 성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이고, 그와 더불어 나와 세상의 관계맺기를 배우는 시기이니까.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성장판이 닫히고, 어른이 되었다고 성장이 멈추는 걸까? 사실 세상의 많은 문제는 성장이 멈춰버린 어른들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는 사람들. 내가 배운 게 길이고 진리고 하나의 정답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업데이트가 안 되는 사람들. ‘평생학습’이라는 말 안에는 ‘사람이란 평생을 통해 배우고, 평생 공부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배우는 사람은 변화하고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달엔 성장소설과 성장영화들 중에 어른의 성장을 다룬 영화와 책을 몇 편 살펴볼까 한다.

 

4285Km를 혼자 걸으며 망가진 삶을 복구한 셰릴

어른의 성장은 대개 고통을 수반한다. 세상의 모든 생물이 고통을 극복하면서 한뼘 성장하듯 사람도 그렇다. 그 고통 중에서도 으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아닐까?

『와일드』의 셰릴은 유년기부터 유난히 애착이 강했던 엄마의 죽음을 계기로 나락에 떨어진다. 엄마 잃은 충격을 이기지 못한 셰릴은 자상한 남편이 있음에도 이 남자 저 남자와 자고, 마약까지 한다. 결국 결혼 5년 만에 이혼하고, 삶이 망가진 상태에 이르러서야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배낭을 메고 4285Km에 달하는 미국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트레킹을 시작한다.

이 책은 어느 산꼭대기에서 배낭을 벗어놓고 쉬다가 등산화 한 짝이 깊은 골짜기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등산화 대신 판때기에 발을 놓고, 테이프를 칭칭 감아 다시 길을 떠나는 셰릴의 모습은 단박에 이야기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처음에는 배낭을 매고 일어서지도 못했던 초보 등산가가 끝내는 ‘PCT의 여왕’ 칭호를 얻기까지 길 위에서의 고군분투와 결코 쉽지 않았던 그녀의 과거사가 교차하며 펼쳐진다.

셰릴의 엄마는 아이들을 학대하는 아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싱글맘이 되었고, 두 남매를 먹여 살렸으며,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그런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셰릴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고, 실제로 그녀의 세상은 무너졌다. 하지만 셰릴은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일어섰고, 트레킹을 하면서 엄마의 죽음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애도하고 떠나보냈다. 그렇게 걸어간 긴 길 끝에 그녀의 새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설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에세이 『와일드』
우진하 옮김, 나무의철학, 2012
※출처: 교보문고

영화 와일드

▲장 마크 발레 감독 영화 <와일드>
2014년 미국 제작, 2015년 국내 개봉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셰릴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와일드>에선 리즈 위더스푼이 셰릴 역을 맡아 그 자그마하고 깡마른 몸에 큰 배낭을 메고, 척박한 트레킹을 한다. 영화 보는 내내 주인공과 함께 먼지를 먹으며, 자갈밭과 물길을 헤치며 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 흔히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는데, 이 척박한 로드무비 역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걸으면 그만인 인생을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찌질한 남자 로브와 윌의 성장기 - 닉 혼비의 소설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큼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도 굉장한 충격이자 고통이며, 성장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이 피델리티』의 로브는 동거하던 연인 로라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게 된다. 로브는 친구들과 음반가게를 하면서 사람들의 음악 취향으로 그 사람을 함부로 판단했던 36살의 철없는 남자다. 로브는 로라가 짐 싸서 나가자마자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여자 베스트5’를 꼽으며 그 안에 로라의 이름을 넣지 않는 것으로 복수하는 찌질한 남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다. 술 사주고, 테이프 만들어주고, 잘 지내는지 전화도 걸어주면 힘 안 들이고 멋진 남자가 될 수 있지만, 오랜 여자친구에게 한결같이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되려면 변기 청소도 하고, 거짓말 하지 않고 매사 성실해야 한다는 것을. 힙한 곳, 힙한 음악, 힙한 패션을 SNS에 올리며 서로의 취향을 곁눈질하고, “저 사람은 나랑 안 맞아.” “쟤는 취향이 구려.”하며 남을 재단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소설은 뜨끔하고 민망하며 공감할 부분이 많다.

로라 이전에 사귀었던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로브는 자신이 얼마나 못난 남자였는지 또 한번 깨닫는다. 그리고 소설 말미에 가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난 날씨나 아랫배 근육이나 프리텐더스 싱글 앨범에 담긴 굉장한 코드 변화가 나대신 내 마음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면서 살아왔어. 그런데 이제는 내가 결정을 하고 싶어.’라고.


 소설 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소설 『하이 피델리티』
오득주 옮김, 문학사상사, 2014
※출처: 교보문고

소설 어바웃 어 보이

▲닉 혼비 소설 『어바웃 어 보이』
김선형 옮김, 문학사상사, 2013
※출처: 교보문고

영화 어바웃 어 보이

▲폴 웨이츠, 크리스 웨이츠 감독 영화 >어바웃 어 보이<
2002년 미국 제작, 국내 개봉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하이 피델리티』를 쓴 영국 소설가 닉 혼비는 찌질한 독신남들의 속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는 작가이다. 그가 쓴 또 한 권의 소설 『어바웃 어 보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는 36살의 철없는 독신남 윌(휴 그랜트)과 12살의 너무 빨리 철든 소년 마커스(니콜라스 호울트)가 나온다. 보통 이런 구도라면 12살짜리 소년이 성장해야 하건만, 이 영화에선 36살짜리 남자가 성장한다. 처음에 윌은 마커스를 질색한다. 자기 삶에 예쁜 여자라면 모를까 우울하고 고집스런 12살짜리 남자아이가 들어온다면 싱글로 사는 어떤 남자라도 탐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커스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윌은 자기만의 성에 문을 닫아걸고서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애써 모른 척 빈둥빈둥 살았을 것이다. 마커스 덕분에 윌은 원치 않는 일에 휘말려 우울증 걸린 마커스의 엄마를 구하고, 왕따 당하는 마커스와 함께 빈 깡통을 맞아주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게 된다. 휴양지 이비자섬 같았던 윌은 마커스로 인해 여러 사람과 얽히고 “나는 여전히 섬이다. 하지만 바다 밑으로 연결된 군도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65일간 524가지 요리를 하며 다른 길을 개척한 줄리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인해 가장 많이 성장하지만, 그런 계기가 없더라도 어른이라면 스스로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줄리 앤 줄리아』의 줄리가 그런 여자다. 배우가 되기 위해, 그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수프가 될 운명을 타고난 감자라면 껍질이 벗겨지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성공을 꿈꾸는 배우라면 반드시 뉴욕을 거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뉴욕에 온 줄리. 그러나 아무리 오디션을 봐도 역할 하나 딸 수 없었던 그녀는 현실의 높은 벽에 무릎 꿇고, 집과 직장을 오가는 따분한 삶을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한 프랑스 요리책에 나오는 524가지 요리를 매일 따라 만들어 블로그에 올려보기로 결심한다. 배우를 꿈꾸던 여자가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린다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 같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게 뭔지 알게 된다.

뻑하면 전기가 나가고, 물이 얼어버리는 좁아터진 뉴욕의 아파트에서 소의 골수를 빼거나 가재를 때려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요리를 하다 남편과 다투기라도 하면, 지금 내가 도대체 뭐하는 짓인가 하는 회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요리를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얼굴도 모르는 블로그 독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았으며, 끝내 자신의 꿈(유명인)에 도달했다. 비록 경로는 달랐지만 그녀는 자신이 바라던 바를 이루었다. 그녀가 요리를 시도하지 않았다면 배우 이외의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말한다. “줄리아는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그건 내가 생각하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자신감이나 의지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들 모두 당연히 필요하고 좋은 것들이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 그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즐거움이다.”

소설 줄리 앤 줄리아

▲줄리 파월 에세이 『줄리 & 줄리아』
이순영 옮김, 바오밥, 2009
※출처: 교보문고

영화 줄리 앤 줄리아

▲노라 에프론 감독 영화 <줄리 & 줄리아>
2009년 미국 제작, 국내 개봉
※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줄리에게 524가지 요리를 하는 것은 일종의 수련이었고, 파리의 외교관 부인 줄리아의 요리책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 책 역시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책에서는 줄리의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 반면, 영화는 현재 뉴욕의 줄리(에이미 아담스)와 과거 파리의 줄리아(메릴 스트립)를 교차해 보여주며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끌어간다.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서 셰익스피어를 읽게 된 래리

성장은 어떤 가혹한 상황에서도 가능하다.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면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갇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람은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 책은 ‘독방에 갇힌 무기수와 영문학 교수의 10년간의 셰익스피어 수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소설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로라 베이츠 에세이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박진재 옮김, 덴스토리, 2014
※출처: 교보문고

17살에 술과 마약에 절어 살인을 저지른 래리 뉴튼은 사형을 면하려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사인해버린다. 자신이 찌른 사람이 누구인지도 기억 못하는 그에게 남은 건 감옥에서의 생활뿐이다. 하루하루 의미없이 날짜만 죽이며 수감생활을 하는 그에게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비정규직 강사 로라 베이츠가 나타난다.

로라는 셰익스피어 연구자로서, 셰익스피어 비극에 나오는 살인자들의 심리가 진짜인지 알고 싶어 슈퍼맥스(독방에 갇힌 최고강력범들의 교도소)에서 죄수들에게 셰익스피어를 가르친다. 죄수들은 일반인들과 다르게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남녀의 사랑 보다는 로미오가 주변 친구들의 압력 때문에 살인하게 되는 상황에 주목한다. 또한 맥베스가 아내에게 단검을 돌려두고 오라고 했던 것은 공범을 만들어 책임을 나눠지려는 의도라는 것을 간파한다. 이를 통해 로라는 셰익스피어 비극에 나오는 살인자들의 심리가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것을 다 모으고도 로라는 수감자 가르치기를 중단하지 않는데, 그건 래리 때문이다. 래리는 똑똑하고 통찰력이 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고, 래리가 써오는 글은 감동적이었다. 래리는 교육을 통해 삶이 변화한다는 것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래리가 쓴 글은 다른 주의 재소자들을 위한 셰익스피어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감옥이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감옥도 사회이고, 감옥에서도 얼마든지 사람은 성장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배우는 삶

신체의 성장과 달리 지식이나 마음의 성장은 구체적인 지표나 숫자로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은 성장하면 변하게 되어 있고, 그 변화는 내 자신이 가장 먼저 알고, 곧이어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게 된다. 얼굴 표정이 달라지고,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으로 우리는 그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매년 연말이 되면 올해 태어나서 처음 해본 일이 뭐였는지 돌이켜 본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고, 익숙한 장소에 가는 게 편한 나이지만, 이 나이에도 여전히 매년 처음 겪는 일이 있다. 소소하게는 태어나 처음 네일케어를 받아보거나 여행 가서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음식을 먹는 것부터 중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거나 위내시경을 받아보는 일까지 처음 해보는 일들의 항목은 다양하다. 그 안에서 배우는 것 또한 다양하다.

아마 올해 연말에는 태어나 처음 깁스를 해봤다는 항목이 추가될텐데,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평소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우리집 계단의 폭이 매우 좁다는 사실, 그러니까 계단 폭은 웬만큼 넓어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서울의 택시 기사님들이 이토록 친절하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카카오택시를 처음 이용해 보고 그 편리함에 반하기도 했다. 장애인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건 물론이다. 목발을 짚으면 손바닥이 제일 아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목발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련의 시간을 견뎌냈을지도 보인다. 다리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이모가 왜 그렇게 심부름을 시켜댔는지도 이제야 이해한다. 앞으로는 그 심부름들 귀찮다 생각지 말고 먼저 배려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은 이렇게 배운다. 나무가 그러하듯 사람도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학교를 졸업했다고, 나이 들었다고, 뭔가 한 자리를 차지했다고 더 이상 배우지 않는 삶은 사실 ‘삶’이라 이름을 붙이면 안되는 게 아닐까? 죽기 전까지 사람은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언급된 책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하이 피델리티』 닉 혼비 지음| 오득주 옮김 | 문학사상사

『어바웃 어 보이』 닉 혼비 지음 | 김선형 옮김 | 문학사상사

『줄리 & 줄리아』 줄리 파월 지음 | 이순영 옮김 | 바오밥

『감옥에서 만난 자유, 셰익스피어』 로라 베이츠 지음 | 박진재 옮김 | 덴스토리


언급된 영화

<와일드> 장 마크 발레 감독 | 리즈 위더스푼 출연

<어바웃 어 보이> 폴 웨이츠, 크리스 웨이츠 감독 | 휴 그랜트, 니콜라스 호울트 출연

<줄리 앤 줄리아> 노라 에프론 감독 | 메릴 스트립, 에이미 아담스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