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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러면 못 써!"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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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배움>에서는 우리 사회의 스승이자 시대의 사표와 함께 배움과 학습의 참된 뜻을 헤아려 봅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며, 웹진 <다들>의 발행인인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김영철 원장이 인터뷰 진행자(인터뷰어)로 나섭니다.




<다들, 배움>과 함께 해주신 분들
창간호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석좌교수
2호김신일 서울대 명예교수
3호박원순 서울시장
4호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5호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6호박재동 한예종 교수
7호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
8호김제동 방송인
9호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
10호이형우 마이다스아이티 대표
11호박영숙 느티나무도서관 관장
12호조은 동국대 명예교수
16호권지웅 민달팽이 주택협동조합 이사장
17호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18호최열 환경재단 대표

김용택 (시인)

‘섬진강 시인’ 김용택은 누구인가?

“내 모든 글은 거기 작은 마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날 것을 믿는다”

1948년 전북 임실 진뫼마을에서 태어났다.(호적에는 51년생으로 되어있다.)

1969년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임용고시에 합격해 1970년 청웅초등학교 옥석분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38년 동안 오로지 고향에서 교편을 잡은 뒤 지난 2008년 정년퇴직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신작시집>에 연작시 ‘섬진강’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꽃산 가는 길>(1987), <그 여자네 집>(1998) 등 여러 시집을 펴냈고, 그 외 저서로는 <콩, 너는 죽었다>(1998) 외 동시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1997) 외 산문집, <김용택의 어머니>(2012) 외 수필집 등이 있다.

1986년 제6회 김수영문학상,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 2012년 제7회 윤동주 문학대상을 수상했다.


▲ 김용택 시인이 태어나 오랫 동안 살아온 집(왼쪽). 지난해 여태명 서예가가 써 준 ‘회문재’라는 현판이 내걸린 시인의 오래된 서재(오른쪽).
시인의 생가가 회문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데다 늘 글이 돌아오라고 회문재라고 이름을 지었다.
요즘 사용하는 서재는 생가 오른쪽 뒤편에 현대식으로 들어서 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암2길 16번지. 마루에 걸터앉으면 맞은편 산자락 아래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가 바라다 보이는 이 깊은 시골 동네가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태어나서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곳이다.


신록이 우렁차게 푸른 줄기를 내뿜기 시작하던 5월 17일 오후, 기승을 부리던 미세먼지도 걷혀 수정처럼 맑은 한낮의 햇살이 산과 들을 온통 푸른 빛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김 시인은 마침 이웃 마을 석장승 복원식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단조롭지만 단단하게 깎아 세운 놈인데 잘 생겼어요. 근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까 없어졌다는 거야. 무겁고 큰 돌이라 포클레인으로 파가지 않으면 옮길 수 없으니까, 동네 사람이 안 끼면 안 되는 일입니다. 시골에 뭣이 없어지면 다 이장들이 팔아먹는 거거든. 강남 부자들이 별장 짓고부터 그런 것들이 많이 없어졌어요. 다행히 그 석장승을 찍어놓은 사진이 있어서 작가가 그걸 복원해서 다시 세웠지요. 그 복원식이 열려서 지금 이웃 마을 다녀오는 길이에요.”


사실, 강의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 김용택 시인을 생가(!)에서 만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그 석장승 복원식 덕분이다. 예전 표지판에는 ‘김용택 시인 생가’라고 적혀 있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지나가면서도 “김용택이 살았나 죽었나?”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안내 문안을 바꿔달라고 군에 민원을 넣었고, 지금은 ‘김용택 시인의 집’이라고 고쳐졌다.


청바지에 빛바랜 갈색 빈티지 티셔츠를 받쳐 입은 김 시인은 활짝 웃으며 인터뷰 팀을 생가 뒤편의 새로 지은 살림집으로 안내했다. 마침 부인이 볼 일이 있어 시내 나갔다며 손수 커피며 차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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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림집 응접실에서 김영철 원장과 대화 중 파안대소하는 김용택 시인.
김 시인은 인터뷰 내내 이런 어린이 같은 웃음을 이어갔다.



병원에서 글을 배우고 평생교육을 실천한 어머니


어머님이 문해교육으로 글을 깨우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머님이 1928년생인데, 3년 전 쯤 병원에서 글을 깨치셨어요. 병원에 누워계실 때 안사람이 병간호를 하면서 심심하니까 어머니 살아온 얘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2시간 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신 거라. 그래서 그걸 녹음을 했어요. 나중에 틀어보니 모든 얘기가 시(詩)고, 역사예요. 안양 방직공장에 징용을 당한 얘기부터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전부 하는데 너무 길게 하시는 거지. 그래서 내가 숙제를 내줬어요.


“다음에 올 때는 살아오면서 좋았던 때를 생각해보세요”라고. 어머니가 아파서 누워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하셔서 다음에 갔을 때 얘기를 해주신 거예요. 근데 그게 또 너무 긴 거라. 그래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인가 물었더니 용택이가 선생 됐을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해요. 근데 그 문장이 너무 좋잖아요? 안사람이 그걸 매직으로 받아썼어요. ‘나는 용택이가 선생 된 때가 제일 좋았다’고. 그리고 어머니한테 그걸 베껴 쓰라고 했어요. 어머니가 남의 말을 잘 듣는 분이에요. 그래서 그 문장을 30분에 걸쳐 베껴 썼어요. 그때부터 안사람과 어머님 둘이 글을 가르치고 베끼고 그렇게 글을 배웠어요. 금방 금방 늘어요.


어머님의 심성 저 밑바닥에 섬세한 시인 기질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그런가 봅니다. 하루는 안사람이 시장을 지나다가 비단 쪼가리가 쌓여 있기에 그걸 샀어요. 그거랑 바늘과 색실을 사서 어머님께 드렸어요. 그랬더니 병원에서 조각보를 이어 너무나 예쁘게 만든 거예요. 수도 놓구요. 그걸로 차받침, 베갯잇, 삼베이불을 만들고, 요즘은 가방도 만드세요. 간호사들한테도 주고. 이쁜 놈은 우리 주고.(웃음)


▲ 서재에 놓인 김용택 시인의 어머니 ‘양글이’ 박덕성 여사의 사진



어머님은 누워서 글도 배우고, 말년에 자기 삶을 가꾸신 거죠. 저는 이게 바로 평생교육이 아닌가 싶어요.


이제는 나라가 나서서 효도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수명이 너무 길어지니까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벅찹니다. 그럴 때 나라에서 노인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는 것이 필요해요.


이런 경험을 정리해서 <나는 참 늦복 터졌다>라는 책도 출간했어요. 복지부나 공무원들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복지정책의 자료로 이 책을 참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맞습니다. 그게 바로 평생교육이지요. 요즘 평생교육 가운데 각광 받는 강의가 노인들 대상의 자서전 쓰기 강의인데, 수강생들도 굉장히 보람을 느끼는 진짜배기인 교육입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즐거워야 어디를 가더라도 즐거워


우리는 자리를 새로 지은 시인의 현대식 서재로 옮겨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시인이 나고 자란 오래된 기와집의 뒤편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현대식 살림집과 서재가 뒷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지막이 숨어 있다. 두 건물을 이어주는 뒷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고 연못도 있다. 비가 오면 물이 넘치는 마당의 물을 잡느라 만든 예쁜 연못에는 올챙이가 산다. 이팝나무와 붓꽃,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 너머 섬진강 가에는 김 시인이 수십 년 전 직접 심은 느티나무가 빽빽한 가지를 머리에 이고 늠름하게 버티고 섰다.


김 시인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근처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 정년퇴직한 후 8년간 전주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러다 생가 주변에 살림집과 서재를 짓고 지난해 4월 이 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유명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부인이 다시 설계했다는 집의 콘셉트는 이렇다. ‘생가인 옛 기와집이 주인이자 공간의 중심인 까닭에 새로 짓는 살림집과 서재는 주변 건물로 작아 보일 것.’ ‘주변 환경과 이질적으로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룰 것.’


그래서 벽돌색도 주변 환경과 어울리는 색깔로 정했고, 집을 지을 때 나온 돌을 버리지 않고 돌담을 쌓았다. 주위에 예쁜 나무가 많아서 집 마당 안에 나무는 따로 심지 않았다고 한다. 살림집이든 서재든 어느 창에서나 섬진강과 김 시인이 직접 심은 느티나무가 보이도록 설계된 이 집은 그러므로 김용택의 자부심 그 자체다. 집을 짓는 데 의외로 돈이 아주 조금 들었다고 귀띔한다.


▲ 기와집 왼쪽 신축한 서재(왼쪽)와 뒷마당에 있는 작은 연못(오른쪽).
연못 뒤로 창문과 함께 보이는 집이 살림집이다.



하루 이틀은 모르지만 1년 넘어 살면 시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유무형의 심리적 압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향이니까 그 압박을 극복한 건가요?


나고 자란 오랜 세월이 그런 압박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소쩍새 우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든가, 달빛이 아름다워 뒤척인다든가 하는 일은 없지요. 오래 살면 자연은 자연일 뿐 사람을 압박하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나도 8년 동안 전주에서 생활하다 왔더니 겨울에 하루 종일 사람을 못 보거나 인기척이 없을 때, 그럴 땐 적막감과 고적함이 약간의 압박이 되더군요. 저도 그럴진대 도시 생활이 힘들어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제가 말립니다. 그냥 거기 살아라,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좋아야 시골에 가서도 즐겁지 어디 간들 거기에도 다 인간이 있다, 신선끼리 사는 것도 아니고, 어디나 삶의 고통과 절망이 있고 시골 온다고 그게 해결되지 않으니 그냥 살던 데 살아라, 그렇게 말합니다.



어린이부터 할머니까지 누구와도 놀 수 있는 강연자


도회지 나들이는 더러 하십니까?


한 달에 스무 번 정도 강연이 있습니다.


자주 나가시네요. 저희가 운이 좋았습니다. 강연 의뢰가 오면 거절하지 않고 다 가시는 편입니까?


일단 강연료가 맞아야지요. 하하하. 왜냐면 여기가 너무 멀어요. 한번 나가려면 전주까지 안사람이 자동차를 태워주고, 거기서 고속버스 타고 가야 되고, 올 때도 마찬가지고. 저녁 강연이 끝나면 막차를 타고 와야 되고.


제가 전국에 안 간 데가 없습니다. 지역 뿐 아니라 층을 따져도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어떤 층을 대상으로라도 죄다 강연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일 겁니다. 초중고 뿐 아니라 시청, 구청, 교육청, 기업체, 연구단지, 대기업 임원 등 다양한 사람들 앞에서 강연했습니다. 강연 내용은 큰 틀에서 같지만 이야기하는 건 그때그때 다르게 하죠. 제가 강연하면서 가장 재밌는 건 공부 안 한 할머니들 앞에서 할 때입니다. 서울 송파구 같은 데 살고 있는 우아한 할머니들 말고.(웃음) 할머니들하고는 정말 재미나게 놀 수 있어요.


자부심이라면 제가 강연할 때 잠자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겁니다. 공무원이 500~600명 모이는 강연에서도 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 김 시인 서재는 천장이 매우 높은 현대식 공간인데, 그 높은 천장까지 각종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시집과 소설책 등 문학류 말고도 인문·사회는 물론 각종 전집류, 잡지 등 정기 간행물들이 빼곡하다.



같이 먹고, 일하고, 노는 것이 공동체를 지속시키는 힘


강연에서 잘 들려주는 단골 일화 한 토막 들려주시지요.


강연 내용은 전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들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과서 외에 책을 안 읽었어요. 그러다가 스물 두 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까 자꾸 어머니 생각이 나는 거예요. 어머니는 글자도 모르고, 그래서 책도 못 읽고, 물론 학교도 안 다녔는데, 마을에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나 마을 이웃 분들의 삶은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노는 겁니다. 이게 공동체의 삶인 거지요. 이 마을이 오래 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그러니까 도둑질 안 하고, 거짓말 안 하고, 서로한테 막말 안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 가지, 즉 같이 먹고, 같이 일하고, 같이 놀고, 도둑질을 안 하고, 거짓말을 안 하고, 막말을 안 하는 것, 이게 공동체를 수천 년 간 지속시키는 근간이 되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사는 게 공부였습니다. 삶 자체가 공부인 것이지요. 그게 평생교육이잖아요? 살면서 터득하고 배운 걸 써먹는단 말이에요. 근데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걸 딱 한군 데만 써먹어요. 시험 볼 때만.(웃음)


어머니나 다른 마을 사람들은 자연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압니다.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생태와 순환의 연결고리들을 잘 파악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옛날에 ‘빗낯든다’ 하고는 장독 뚜껑을 덮고 일하러 가셨어요. 비가 얼굴을 들었다는 거지요. 놀라운 표현이잖아요? 비 얼굴을 미리 본 겁니다. 이렇게 자연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고 자연이 시키는 일을 잘해요.


그리고 삶이 예술이었어요. 따로 예술 활동을 하지 않아, 이 분들은. 고추농사를 짓고 벼농사를 짓는 게 예술이에요. 무엇이 예쁜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어울리는지를 죄다 알고 있어요.


어머니가 늘 나한테 하는 말이 “사람이 그러면 못써”, 이런 말이었어요. 여기 이 서재에 있는 책들을 다 읽고 한 줄로 줄여라 하면 “사람이 그러면 안 돼.”이거 아닙니까? 공부란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또 “싸워야 큰다.”는 말도 해요. 싸우면 모순이 드러나니까, 그것을 고치고 바꾸고 맞춰서 정리하고 새로운 세계로 가자는 거지요. 그런 걸 제가 배운 겁니다.


저 앞에 있는 느티나무가 내 나무거든요. 내가 심은 나무. 나무를 심어놓고 보니까 나무는 정면이 없어요. 우리는 늘 정면을 보고 살잖아요? 하나의 답만 있다 생각하고. 보수와 진보가 극단적으로 갈라지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갈라진 것도 한쪽만 선택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나무는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거든요. 어디서 봐도 다 정면이에요.


나무는 경계가 없어요. 이건 받아들이고 저건 안 받아들이는 게 없어요. 다 받아들이거든요. 그래서 자기를 완성시켜요. 나무는 언제 봐도 완성되어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요. 그런데도 볼 때마다 달라지거든요. 아침에 볼 때, 저녁에 볼 때, 비올 때, 햇볕 날 때 다 다릅니다. 그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다 받아들이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때문이에요. 경계가 없고, 정면이 없고, 다 받아들이는 데도 느티나무는 평생 느티나무로 살거든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도 안 변해요.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고 사는 겁니다.



“아빠, 김수영의 봄밤 그만 보내세요, 28번째 보냈거든요”


아… 그런 것들을 강연에서 말씀하시는군요. 참 좋은 말씀입니다.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제가 저녁 8시30분에 자요. JTBC 손석희 뉴스를 봐야 되는데 끝까지 못보고 잠듭니다. 그러다보니 ‘팩트 체크’를 한 번도 못 봤어.(웃음) 그러면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요. 그때 일어나서 마당에 나오면 별이 떠 있어요. 서서 별도 보고, 달도 좀 보고 4시쯤 인터넷에 들어가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 봅니다. 사설, 칼럼을 보고, 인터뷰 기사도 좋아해요. 그리고 각 신문에 실린 시를 찾아봐요. 김사인 시인이 멋진 시를 찾아서 연재하는데, 그걸 제가 3명에게 보내요. 며느리, 사진 작가, 카피라이터. 셋이 함께 아프리카를 갔었거든요. 아들이나 딸한테는 예전에는 보냈는데 지금은 안 보내.


어느 날 우리 아들이 전화가 왔더라고. “아빠, 이제 김수영의 봄밤 좀 그만 보내세요. 벌써 스물여덟 번 째 보냈거든요.” 하하하.


그러고 나면 5시쯤 새가 울기 시작합니다. 새 울음소리 녹음 하고, 카메라를 들고 산책을 나가요. 느티나무 사진도 찍고, 꽃도 보고, 바람이 불고 새가 나는 걸 핸드폰으로 녹화하기도 하구요. 새들이 연애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7시 좀 넘고, 아내가 7시 반쯤 일어나면 밥을 먹고 강연하러 가지요.



본업이 시인이신데요, 지금도 창작을 하고 계십니까?


작년 4월 23일에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이사 온 날부터 지금까지 날마다 일기를 썼어요. 어제 일기를 오늘 아침에 써요. 원고가 3천5백매 정도 나오더라구. 출판사에서 그 원고를 가져갔어요. 어떻게 책을 만들까 궁리 중이지요.


작년 9월에 <울고 들어온 너에게>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연속선상의 글이 써져서 시집 1권 분량의 글을 가지고 있어요. 안사람이 그건 좀 묵혔다가 내년쯤 내자,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시집을 많이 내는 것보다 진짜 시집을 내자, 그러더라구요. 그러려구요.



한국 동시의 판도를 바꾼 <콩, 너는 죽었다>


어린이용 책도 많이 쓰셨더라구요.


예, <콩, 너는 죽었다>가 동시집 중에 가장 많이 팔렸어요. 나온 지 20년이 됐는데, 1년에 1만부 정도 나가요. 지금도 꾸준히 나가고. 지금까지 20만부 넘게 팔렸지요. 그 동시집이 우리 동시의 판도를 바꿔놓았어요. 그 시집이 나오기 전까지 예쁜 동시만 쓰다가 시골의 진짜 생활이 동시에 나온 겁니다.


제가 초등학교 2학년만 26년을 가르쳤어요. 제가 졸업한 덕치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공립교사는 5년에 한 번씩 인사이동을 하잖아요. 저는 계속 덕치초등학교에 있고 싶어서, 5년 동안 덕치초등학교에 있다가 1년 간 근처의 다른 데 갔다가, 다시 덕치 와서 5년 있다가 또 다른 데 1년 갔다 오고 하는 식으로 31년간 덕치초등학교에 재직했어요. 그중에서 특히 2학년을 계속 가르쳤는데, 어느 해에 애들더러 “시를 써봐라” 하고는 나도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같이 시를 썼어요. 그렇게 20일 만에 동시집 한 권 분량의 시가 모였고, 그걸 실천문학에서 가져가서 <콩, 너는 죽었다>가 나온 겁니다. 이때부터 유명 시인들이 동시를 쓰기 시작했고, 애들과 계약서 써서 인세를 주고 묶어 내기도 했지요. 그게 또 잘 팔렸고.


한번은 환경연합이 하는 피스보트로 애들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가게 됐어요. 근데 애들 용돈이 없어서 부랴부랴 책을 만들었어요. 애들 노트를 싹 걷어서 한 집에 10만 원 이상, 많이 실린 놈은 30만원씩 인세를 줬지요. 그걸로 용돈해서 15박 16일 동안 홍콩, 일본, 베트남 등지로 갔다 왔어요.


▲ 서재 앞쪽으로 큰 창을 냈다. 블라인드를 활용해 마치 액자처럼 창밖 풍경을 담았다. 구절초 꽃밭 너머로 섬진강이 보인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좋은 경험이었겠습니다. 김용택이라 하면 ‘섬진강 시인’으로 유명한데, 바로 건너 보이는 저 물줄기가 섬진강 상류이지요? 근데 생각보다는 좀 작네요, 강이.


하하, 그렇죠. 강이 아니라 도랑이죠. 화가 임옥상씨가 우리 집 왔을 때 저기 서서 “근데 형, 섬진강은 어딨어?” 하더라고요. 네가 보는 그게 섬진강이다 했더니 “이게 무슨 강이여? 섬진도랑이지” 하더라고요. 강 자체가 짧아요. 진안에서 발원해서 임실, 순창, 남원, 곡성, 구례까지 600리 정도 됩니다.


근데 사람과 굉장히 가까이 있는 강이지요.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사니까, 사람들이 건너다녀야 하니까. 사람과 친한 강입니다.


저 강이 1년에 세 번 정도 큰 비가 와서 뒤집어져요. 제가 심어놓은 느티나무에 물이 찰 때까지 비가 와야 돼요. 그렇게 한번 뒤집어져야 생태계가 순환되는데, 최근 3년 정도 큰 비가 안 내렸어요. 그래서 강이 썩어가요. 오염원도 많고요. 요즘 마을마다 하수종말처리장을 짓고 있는데, 그게 만들어지면 좀 나을 거예요. 전에는 은어가 있는 강이었는데, 요새는 은어는 없고, 다슬기는 좀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편해요


이름도 날리고, 돈도 좀 벌고(웃음), 집도 새로 짓고, 이제 뭘 하시고 싶으십니까?


저는 살아오면서 뭘 하고 싶은 게 없었습니다. 선생을 일찍 시작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만 살면 됐어요. 그냥 산겁니다. 책 읽고 애들하고 놀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시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구요. 시인이 되리라고 생각한 적도 물론 없구요.


책을 읽다 보니까 생각이 많아져서, 그걸 글로 썼고, 시간이 가다 보니 그 시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고, 그렇게 해서 시인이 됐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뀐 것도 없습니다.


지금도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어. 희망이 없어 편해요. 희망이 어쩌고 하면 불안해. 뭔가 이뤄야 되잖아요. 이루려면 얼마나 힘들겠어? 바라는 게 없으니까 편하지.


▲ 인터뷰를 마치고 김 시인의 생가에 있는 서재 ‘회문재’ 앞마루에 앉아 집주인을 가운데 두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조한준 주임, 이유정 기자, 김영철 원장, 김 시인, 김혜영 팀장, 전아림 주임.



마침 김 시인을 보러 외지에서 손님들이 찾아왔다.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가져온 시집에 사인을 받았다. 최근 드라마 <도깨비> 덕분에 베스트셀러가 된 시선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에 사인을 해주며 시인은 “이 시집 덕분에 도깨비가 있다는 걸 실감했다”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손님들이 떠나고 마당으로 나오자 이번에는 서울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섬진강까지 내려온 하이킹족들이 김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시인은 스스럼없이 그분들과 어울리고 함께 사진도 찍어주었다.


꾸밈없음, 자연스러움, 뭔가 이루려하지 않음, 그러나 경계가 없고 정면이 없고 매일 바뀌지만 한 번도 나무 아닌 적이 없었던 느티나무처럼, 시인은 여전히 그 집에서 그렇게 시인으로 살고 있다.



최근 시집 <울고 들어온 너에게>에서 시인이 울고 들어온 너에게 해주는 것은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 엉덩이 밑으로 두 손 넣고 /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되작거리다 보면 / 손도 마음도 따뜻해진다. / 그러면 나는 / 꽝꽝 언 들을 헤매다 들어온 / 네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다.”


우리는 안다, 밖을 헤매다 들어온 볼에 닿는 덥힌 손바닥이 얼마나 따뜻한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정리/김영철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원장, 이유정 <다들>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