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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탈진실’의 영역, 젠더

마정윤(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시작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라는 책이였다.
이 책의 필자들은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나의 페미니즘' 순간들을 풀어내었다.
<다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김홍미리 선생님이 추천한 마정윤 선생님 글로 그 기회를 만들어 본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의미도 더한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저자: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영정, 김홍미리, 전희경. 출판: 그린비.


마정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2016년에 이어 2017년에도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페미니즘 관련 대중 강연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동 프로젝트의 모금활동도 줄을 잇는다. 그 뿐인가. 페미니즘 서적의 판매권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이토록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선언에, 남성들이 역차별받는 시대라는 목소리가 올라가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에는 2016년에 있었던 강남역 살인사건이 자리한다는 점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대표적인 놀이공간이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다 피해 여성이 가해자를 무시했기 때문에 죽였다는 가해자의 자백은 이 사회의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무시와 조롱의 기억을 소환하였다. 이에 여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는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에 분노하고 모여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러한 현실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지만,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궁금증은 확산되었고 이것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단지 여성의 문제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흔히 젠더불평등으로 이야기되는 젠더문제 전반에 관한 개입과 변화가 페미니즘의 관심사다. 젠더는 남성과 여성으로 이야기되는 성별이분법만을 일컫지 않는다. 젠더에 관한 초기 논의는 남성과 여성을 길러내는 사회문화에 집중되었다. 시몬느 드 보봐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이 이 논의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여성성/남성성이 어떻게 길러지는지에 몰두하면 할수록 남성과 여성의 젠더구조가 해체되기보다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회구조를 그저 설명하는 것에 그치게 되었다. 여기에 진화심리학이나 성과학과 같은 학문이 성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를 생산함으로써 이러한 경향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진화심리학과 성과학은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의 차이에서 논의를 시작하여 그러한 차이가 우리가 흔히 목격하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식의 논의로 발전한다. ‘과학’의 이름으로 남녀의 차이가 정당화되며 현재의 차이를 자연적인 질서로 인식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남녀의 차별로 이어지고 이러한 차별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흔히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이라는 개념으로 쓰이던 젠더가 ‘구성된다’는 점에 더욱 깊게 주목하면서 페미니즘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무엇이 이 구성에 영향을 미치는가, 누가 구성하는가와 같은 질문들로 채워졌다. 이에 따라 젠더는 단지 남녀의 차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사회구조, 사회적 통념, 문화적 관습 등을 모두 포함하는 사회체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통념과 관습처럼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되는 요소들로 인해 여성들 스스로도 젠더 불평등한 구조에 기여하고 있다는 성찰 또한 이루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아주 ‘미량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여자가 여자를 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하는 젠더 불평등한 구조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삭제된 언술이자 이러한 구조를 재생산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이들에 대한 논의가 삭제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만들어내는 사회체계가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도 밝혀졌다. 이러한 이론적 논의를 거쳐 현재의 페미니즘에는 남성성 연구, 퀴어 연구가 포함되기도 하고 분화되기도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페미니즘은 사회이론의 한 분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성별사회체계로 인해 배제당하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를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이며, 정치적 운동 자체의 역동성으로 인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성찰, 변화하는 것을 그 성질로 요구한다는 점이다. 현재의 페미니즘은 ‘낙태죄 폐지’, ‘차별금지법 제정’, ‘디지털성범죄 아웃’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을 제기하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페미니즘의 새로운 세대가 수혈되고 있다.

남녀 이분법의 성별을 만들어내는 사회체계인 젠더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면 젠더는 우리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족, 학교, 회사, 동네, 미디어 등에서 이른바 ‘바람직한’ 여성상과 남성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동시에 바람직하지 못한 상을 만들어낸다. 사회적 기준을 세워놓고 맞지 않으면 ‘일탈’이라고 낙인찍거나 애써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려 애쓴다. 사회 규범과 관습은 우리의 몸을 형성하는 동시에 성역할을 부여한다. 그래서 어느 새 우리의 머릿속에는 현모양처, 조신한 신붓감, 여성을 보호하는 ‘강한’ 남성 등과 같은 특정 성에 대한 ‘특정한’ 인식이 자리 잡는다. 남성에 비해 여성에 대한 제약과 통제가 심하며 ‘보호’란 명분으로 여성의 일상을 규제한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은 몸의 경험이 다르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좁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 세상을 마주하는 자신감과 용기에도 영향을 끼쳐왔고 여성과 남성은 폭력이나 공포에 대한 감수성 자체가 다르게 형성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에 수많은 여성들이 공명했듯이, 여성들은 살아오면서 음담패설에서부터 강간까지 성적 괴롭힘, 성희롱, 성폭력을 적어도 한 두 번은 겪는다. 여성과 남성의 일상세계 자체가 매우 다르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 규범과 관습을 지키고자 하는 개인의 노력, 공동체의 규제 등으로 성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사회는 재생산되며 이는 고정관념으로 변해가다 결국엔 특정 성에 대한 편견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편견의 근저에는 여성이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하기 때문에, 힘든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또한 여성이 가지는 임신, 출산의 신체적 기능으로 인해, 육아는 여성의 몫이라는 고정관념과 여성의 자리는 집으로 고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은 바깥일, 여성은 집안일로 공사영역이 나뉘어 있다는 관념은 가정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국가나 사회 공동체가 개입해서는 아니 되는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 사회도 남의 집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고 가족 내 심각한 폭력이 발생해도 공권력 개입은 고사하고 경찰에 신고해도 타일러서 돌려보내는 황당한 현실은 여전하다.

개발을 중시하며 경제성장이 시대과제였던 지난 시기에, 우리 사회에서 국가경제와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아버지는 기가 꺾여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바깥일을 하는 아버지도 본인을 돌볼 줄 모르고 일만 하느라 다른 가족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모르는, 아무도 제동을 걸지 않는 시대에 부지불식간에 폭력을 행사하는 가장이 되어갔다. 반면 엄마는 기가 눌려 살거나 괄괄하게 맞받아치며 생활력 강한 중성적 존재가 되었다. 평화로운 한 때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폭력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가족생활이었다. 직접적으로 가족구성원의 신체에 행해지는 물리적 폭력이 없더라도 툭하면 밥상이 엎어지기도 하고 집안의 물건이 깨어지기도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가정의 일은 사적 영역이니 누구도 개입하려 하지 않았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오던 세월이기도 했다.

우리 대부분은 어찌 보면 모두 ‘가족 전문가’다. 어떠한 형태의 가족에든 속해서 살아온 개인의 경험이 있으며 주변을 관찰하며 목격해온 가족의 모습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그리고 주변 가족의 모습에 대한 관찰은 가족이란 단위에 대한 개인의 ‘지식’이다. 고학력 여성의 증가와 외동의 높은 비율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와 “엄마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가 만나는 시대를 만들어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여성의 전략은 무엇일 수 있을까. 비혼 1인 가구의 증가와 출산율 저하는 합리적 귀결이다.

여기에 노동의 문제가 더해진다. 일자리 자체가 별로 없고 그나마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현실은 남녀 모두에게 암울하다. 그러나 좀 더 들여다보면 여성은 남성 임금의 64%에 머물고, 인공지능과 알파고의 시대라 해도 남성적 직무와 여성적 직무로 나뉘어져 있는 구조는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정규직 여성들의 유리천장도 남아있고 육아휴직의 확대는 더디기만 하다. 결혼, 출산, 육아와 세트로 따라오는 경력단절여성이란 단어도 낯설지가 않다.

얼마 전에 부산대 정치외교학고 로버트 켈리 교수의 BBC 인터뷰 영상이 화제였다. 북한의 정치상황에 대한 인터뷰 도중에 ‘침입’한 어린 딸로 인해 방송사고가 된 이 영상은 동양인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렸지만, 사실 이 영상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터뷰의 장소가 ‘집’이라는 점이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는 이 영상에서처럼 일상이 끊임없이 ‘침입’당한다. 이 영상을 패러디한 뉴질랜드 TV쇼 ‘Jono and Ben’은 인터뷰하는 엄마가 ‘침입’의 상황을 얼마나 잘 대처하는지를 과장되게 보여준다. 폭탄까지 제거하는 장면은 코미디 요소라고 쳐도 아이를 기르는 일하는 엄마들의 멀티태스킹 능력에 대한 이야기는 나름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노동시장에서 인정받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투자되어야 할 물리적 시간이 있다. 그러나 육아와 가사를 대부분 책임지는 여성들은 이 시간이 조각나 있다. 그래서 발버둥을 치지만 현실은 고단하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주문처럼 외워볼 뿐이다.

오늘날의 페미니즘은 위에서 열거한 모든 것에 도전하고 있다. 여성을 단속, 통제하는 사회규범에 저항하기, 다종다양해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멈추게 하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돌봄을 사회적 영역으로 위치시키기 등. 이 모든 노력은 오래도록 해왔고, 여전히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해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된 현상이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이야기하면 ‘잠재적 가해자’ 운운하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고,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 ‘역차별’ 소리가 나온다. 성폭력 피해는 가해자가 하지 말아야 할 ‘범죄’를 저질러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 된다. 본말이 전도된다.

2016년에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탈진실(Post-Truth)’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탈진실’은 “실제 일어난 일보다 개인적인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는 현상”을 일컫는다. 최근에 ‘가짜뉴스’ 때문에 시사상식용어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젠더의 작동영역은 ‘탈진실’의 영역이었다. “여자가 감히 어디...”,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옷차림이 그 모양이니 그 꼴을 당하지” 등, 일어난 사건을 개인들의 신념대로 해석해왔다. ‘탈진실’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탈진실’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더 객관적인 데이터와 상황, 맥락을 강조하면 된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젠더의 ‘탈진실’에서 벗어나는 것은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를 없애려 하지 말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는 자세의 전환과 그러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먼저 있어야 한다.


마정윤



-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수료
- 여성주의 연구활동가